「대성당」을 읽고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단절된 존재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 내에서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파트에 살면서도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웃의 정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졌고, 서로의 공간에 침범하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며 디지털 매체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발달로 우리는 더더욱 타인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서로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관계와 소통에 대해 힘든 시기인 와중에 「대성당」을 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성당」 수록된 12편의 단편 소설 중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기차」, 「대성당」 세 작품에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었다. 내 경험을 비롯하여 현대 사회에 닮은 점 들을 비유하며 ‘소통’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 출처 : YES 24

 누군가의 사소한 관심은 때로는 큰 위로가 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희망만 주는 의사들, 앤과 하워드, 연결되지 않은 빵집 주인의 전화는 의사소통의 부재를 내포한다. 여기서 빵집 주인의 사과와 따뜻한 롤빵 한 조각이 앤과 하워드에게 위로가 된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아주 사소한 말일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준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 가정 문제, 대인 관계, 학교생활, 진로에 관련한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나를 덮친 적이 있다. 누군가의 위로와 관심이 필요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삼켜버린 커다란 우울함이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았던 걸까. 친구는 내게 ‘힘든 일 있어?, 힘들면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을 넌지시 던져주었고,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빵집 주인의 롤빵 한 조각과 같았다.

 내가 보는 다른 사람의 낯선 모습은 곧 또 다른 이가 보는 나의 모습일 수 있다. 「기차」에서 ‘미스 덴트’는 중년 여인과 노인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중년 여인과 노인 사이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새로운 승객에게 낯선 이일 뿐이며, 심지어 동행으로 오해받았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서로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본인이 본 상황만 인지하게 된다. 공공장소나 대중교통 이용 시,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지나친다.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으며, 우연히 같은 상점에 동시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직원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두 분 일행이신가요.’ 서로는 당연히 같이 온 사람이 아니며 당연히 따로 왔음을 알겠거니 생각하며 상점에 들어갔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둔다. 그러나 누구든 타인에게 이해 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지각해야 한다.

▲ 출처 : 한겨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표면적으로 소통을 어렵게 하는 눈을 감는 행위가 「대성 당」에서는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참으로 철학적인 내용이다.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일차원적으로는 언어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보며 귀로 듣고 말할 수 있음에도 서로 불통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 소설 속 맹인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임과 동시에 진정한 소통의 의미란 감정을 공유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관계에 있어 소통은 중요하다. 개인주의가 되어버린 지금, 서로가 서로의 의사와 감정을 소통하지 않음에도 그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관심 받기를 원한다. 많은 이들은 SNS 속에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하곤 한다. 「대성당」을 통해 서로의 관계 속에서 따뜻한 언어를 주고받으며 롤빵 한 조각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곧 소통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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